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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학개론

구한말 선교간호사 에드먼즈, 쉴즈, 셰핑

by 널스톡톡 202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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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간호에서 근대적인 간호사업이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구한말 한국에 도착한 벽안의 선교간호사들의 노력 때문이다. 1891년 한국에 처음 도착한 최초의 서양 선교간호사인 에밀리 히드코트(Emily Heathcote)를 위시하여 웹스터(Elizaveth Webster), 제콥슨(Anna Jacolson), 쉴즈(Esther L. Shields) 등이 들어오고 1910년 경술국치 전까지 조선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22명의 선교간호사가 우리땅에 들어와 활동하였다. 

그 중에서도 한국 간호교육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세명의 간호사가 있는데. 에드먼즈, 쉴즈, 셰핑이 그들이다. 한국의 근대간호를 태동시킨 3인의 벽안의 간호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 최초 근대간호교육을 시작한 에드먼즈

마가렛 에드먼즈

한국에서 근대적 간호교육이 처음 실시된 곳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간호대학의 전신인 정동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이다. 미국 감리교 선교간호사였던 마가렛 이드먼즈는 1902년 대한제국 시기에 우리나라에 파견되었고, 1903년 한국 최초로 정동 보구여관에 간호부양성소를 세웠다. 1903년 최초로 간호부 양성소에 입학한 학생은 병원에서 보조역할을 하던 6명의 기독교인들이었다.  교육기간은 3년 과정이었고, 이론 및 실습을 병행하였다. 간호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부모동의서, 건강진단서, 교회추천서와 소액의 입학금을 내야 했다. 에드먼즈는 그 당시 'Nurse'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다는 것을 알고, 간호원 호칭을 사용하였다. 에드먼즈는  간(看)은 'To take charge of; whatch over', 호()는 'To aid; protect and guard' 그리고 원(員)은 'A member'의 의미라고 하였다. 1908년에는 한글로 된 간호교과서 상,하권을 집필하여 간호부 양성소 교재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보구여관 간호부 양성소의 교육과정은 1학년에 간호사의 자격, 인체골격, 순환, 혈액검사, 병원규칙, 찜질, 침상만들기, 환기, 수술준비, 저명인사의 일생회고의 교과목을 이수해야 하고, 2학년은 응급, 치과, 식이요법, 산과, 해부, 나이팅게일 생애를, 3학년에는 위생, 이비인후과, 열, 수술, 외과 드레싱 등을 학습하도록 교육과정이 구성되어 있었다. 

실습은 초기에 12시간 근무제로 강의와 실습을 병행하였으며, 실습 내용은 붕대법, 침상만들기, 목욕법, 투약, 간단한 식이 준비, 활력징후 측정, 증상기록, 특수약물 투여, 세척, 찜질, 드레싱, 약 도포, 마사지 원리, 사후 처치 등이었다. 이후에 의학과목이 더욱 세분화되어 첨가되고 간호학 과목도 늘어났으며 전공과목 이외에 성경, 음악, 산수, 국어, 한문, 영어 등을 배웠다. 처음 입학생들이 간호학 공부를 위한 기초교육이 되어 있지 않은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교육과정 내용을 보면 현재 간호대학의 교육과정이 교양, 전공기초, 전공 교과목으로 구성되어 사회에 필요한 교양을 갖춘 전문인으로 양성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다. 구한말 여성의 교육기회가 드문 시대에 높은 수준의 교육과정을 운영한 것이다. 

1906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가관식(현재의 나이팅게일 선서식)이 거행되고 에드먼즈가 학생들에게 캡을 수여하고 학생들을 격려하였다. 1907년 제2회 가관식은 정동교회에서 세브란스 간호부 양성소 학생과 함께 합동 가관식을 진행하였다. 

처음 보구여관 간호부양성소에 입학한 6명의 학생 중  4명은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었지만 1908년 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한국 최초의 졸업간호사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였다. 에드먼즈는 2해에 걸쳐 간호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이후 에드먼즈 의사와 결혼한 후 목포로 내려가 목포와 군산에서 교회 개척과 복음사역에 전념했다. 

에드먼즈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간호부 양성소를 만들고 근대간호교육을 시작했으며 한국 최초의 졸업간호사를 양성한 인물로 기념되고 있다.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린 쉴즈

 

한국간호의 발전을 위해 40년간 독신으로 봉사한 에스더 쉴즈

 

한국 간호계의 대모로 불리며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리는 쉴즈는 에드먼즈보다 몇해 전인 1897년 10월에 조선에 와서 필드의사와 제중원에서 일했지만 병원의 열악한 환경에서 몸이 허약해졌고, 1902년 목포에서 잠시 휴가를 보낸 후 1903년부터 1905년 7월까지 평안도 선천에서 일했다. 그리고 1년 간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새로 개원한 세브란스 병원에 돌아와 1906년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쉴즈는 세브란스 간호부 양성소에서 간호사 양성의 꿈을 펼칠 수 있었다. 세브란스 간호부 양성소는 안나 제이콥슨(Anna P. Jacobson)이 시작하였지만, 학생을 받지 못했고, 본격적인 간호사 양성이 이루어진 것은 에스더 쉴즈(Esther L. Shields·1868~1940)에 의해서다. 1907년 2명의 입학생을 선발하여 교육을 시작했고, 1910년 6월 10일 세브란스 간호부 양성소에서 제1회 졸업생 김배세를 배출하였다. 이후 동창회를 조직하여 한국인 간호원의 친목과 교육을 도모하고, 간호학 교과서 편찬에도 노력하였다. 그녀의 제자들은 한국의 여러 병원에서 수간호원으로 일했다. 

 1900년대 초 한국의 의료체계는 그야말로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고종에 의해 세워진 근대식 병원이었던 제중원은 애초 궁궐과 고위층을 위한 진료소였으며, 선교사들이 운영권을 이양받은 이후부터 가난하고 헐벗은 서민들에게 빗장을 열기 시작해다. 보구여관 역시 정동에 문을 열었을 때, 지역의 특수한 정황상 일반 서민들이 찾아오기가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서민들이 편안하게 찾아오도록 동대문으로 옮기면서 비로소 부인과 치료 시설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의료진은 서양에서 온 선교하는 의사들이 대분분이었다. 서울에 온 간호선교사들은 이런 이유로 친목과 연구목적의  재선(在鮮) 서양인간호부회를 1908년 발족하였고, 에스더 쉴즈가 초대회장이 되었다. 

쉴즈는 1935년에 은퇴하였으나, 1938년 12월까지 세브란스병원에서 봉사하면 30년 이상을 한국 간호교육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1939년 2월 펜실베니아 고향에 돌아갔고 이듬해 1940년 11월 8일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국의 마더 테레사, 한센인과 고아들의 어머니 셰핑

 

 

이미지 출처ㅣ 이료주간

 

세핑은 우리에게 서서평(徐舒平, 1880-1934)이란 한국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셰핑은  1912년 조선에 왔는데, 초기에 광주 봉선동의 문둥병원에서 2년, 패터슨 의사가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운 군산 구암병원에서는 1917년 세브란스병원으로 파견될 때까지 3년을 일했다. 이 무렵 셰핑은 에드먼즈 해리슨 부부와 더불어 군산지부에서 3년을 함께 일했다. 서서평의 리더십은 이때부터 두드러졌다. 군산에 간호학교 설립을 청원하고 이에 대한 자금도 선교부에 요청한다. 당시 장로교는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평양신학교, 숭실대학 등을 독자 운영이 아닌 각 교단이 연합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런 이유로 남 장로교단은 이미 세브란스 내에 간호부 양성소가 있어 간호학교 설립을 허가하지 않는 대신, 군산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소규모로 간호사를 양성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1917년 가을 셰핑은 세브란스로 옮겨가면서 군산에서 길렀던 제자 두 명, 이효경(李孝敬)과 이금전(李金田)을 세브란스로 데려간다. 이금전은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예방 간호에 대한 과정을 연구, 6·25전쟁 후 연세대 간호대학장과 대한간호협회장을 지냈고, 이효경은 엘리자베스 셰핑이 조선간호부회 회장 재임 10년 동안 부회장과 만주 동포 위문단을 이끌었다.

 에드먼즈는 1914년부터 1917년까지 군산지부에서 셰핑과 함께 보내며 셰핑의 헌신과 리더십을 목격한다. 이후 에드먼즈는 재선 서양인간호부회의 해체와 대한간호협의 기원이 된 조선간호부회로의 합병에 힘을 실어준다. 셰핑은 1917년부터 1919년까지 세브란스에 머물면서 에스더 쉴즈와 세브란스 간호학교를 맡기도 했다. 이렇게 셰핑을 주축으로 에드먼즈, 쉴즈는 근대 한국 간호계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1923년 셰핑은 기존의 재선 서양인간호부회와 그동안 양성한 조선인 간호사들을 섞어 조선간호부회를 발족시키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조선간호부회는 오늘날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이다. 셰핑은 1934년 죽기 한 해 전까지 10년에 걸쳐 조선간호부회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은 쉴즈와 에드먼즈를 비롯한 재선 간호 선교사들의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일본은 셰핑이 조선인들을 치료해주고 독립지사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세브란스를 떠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서울활동을 금지시켰다. 셰핑은 광주에 내려와서 맨 먼저 한국말과 한국 풍습을 익히면서 이름도 한국식으로 지었다. 그는 원래 성격이 조급했기 때문에 매사에 서서(徐徐)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을 서(徐)씨로 하고 이를 또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 자를 천천히 할 서(舒)자로 두 번째 자는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이라 했는데 이는 그의 본 이름인 쉐핑의 발음을 살린 것이기도 했다.

서서평은 간호사로 사역했으나 성경 교사로서 한국 언어를 무척 잘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문화를 탁월하게 이해해 전주와 군산, 광주 등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했다. 서서평은 특히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다.

 셰핑은 조선간호부회 회장으로 재임하였던 10년 동안 실용간호학과 간호학 교과서도 번역, 편찬했다. 그리고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했다. 조선 사람들에겐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이러한 기여 이외에도 셰핑은 조선간호부회를 세계간호협회의 정회원으로 가입시키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식민 통치 아래에서 본인이 회장을 맡고 있을 때에 조선간호부회를 단독으로 국제기구에 가입시켜 잃어버린 조선인의 위상을 찾고자 노력한 것이다. 1929년 7월, 셰핑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국제간호협의회(ICN·International Council of Nurses) 총회에서 1500명의 대의원 앞에서 조선의 국제간호협의회 가입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였고 주권이 없는 나라로서 협회 가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꿈은 그가 길러낸 제자들에 의해 1949년 조선간호부협회가 국제간호협회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서서평은 한국에 와서 당시 조선인들도 돌보지 않았던 한센병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흔히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나병(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나병환자의 치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33년에는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했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에 달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을 다 들었다. 이로 인해 일제총독부는 소록도에 나병환자 단독시설을 허락하고 지금의 국유지인 전남 소록도가 있을 수 있었다.

서서평은 자신의 임금 대부분을 걸인과 빈민과 나환자, 여성을 위해 사용했다. 그녀의 관심은 언제나 버림받은 고아와 가난한 과부에 머물렀다. 고아들을 친 자식처럼 아껴주었고,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여성들은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고아 14명을 자녀로 삼고, 오갈 데 없는 과부 38명과 한 집에 살면서 이들을 돌보았다. 서서평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찾았다. 서서평은 ‘성미 제도’를 활용했는데, 이것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이 제도는 머지않아 조선 예수교장로회의 공식사업으로 채택되었다. 개인 차원의 긍휼이 교회차원의 긍휼사업으로 승화된 것이다. 실제로 서서평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 쓰는 비용을 최대한 줄였다. 여러 가지 비용 가운데 식비를 줄이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선교사들이 하루 식대로 3원을 쓸 때, 서서평은 10전으로 하루를 버티면서 돈을 모았고, 그렇게 모인 선교비를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이러다보니 결국 서서평은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34년 6월 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는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을 때 남기고 간 전 재산은 담용 반장, 쌀 두홉과 현금 27전이 전무였다고 한다.

그가 떠나자 광주 양림동 오웬기념각에는 그로부터 사랑받았던 창녀들, 문둥병자, 남편으로부터 소박맞은 가난한 여인들, 부동교(不動橋) 밑에서 고단한 삶을 살던 걸인들이 함께 모여 범시민적 추도회를 거행했다. 조선간호부회는 회지에 ‘한국 민족의 슬픔을 안고서 가신 님’이라는 제목으로 서서평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광주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뤄졌다고 한다. 

서서평은 자신의 시신까지 의학용 해부용으로 기증한 철저히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따른 섬김의 삶을 살았다. ‘쉐핑’(Schepping)은 이디시아어로 샘에서 무엇을 끌어내다(Shep), 그로부터 큰 기쁨을 얻고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서서평은 큰 기쁨이요, 자산이다. 서서평은 지금도 광주광역시 양림 뒷동산에 묻혀 있으며 그녀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흔적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서서평 선교사의 책상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이라는 좌우명이 붙여져 있었다.

이러한 서서평의 일대기는 2017년 CGN TV에서  '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전국적으로 개봉되었고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지 출처: 월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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